나는 신이다 넷플릭스 다큐로 인해 다시 구원파가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1. 개요[편집]
통칭 '구원파'라고 불리는 곳으로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라는 이름 아래 평신도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1981년 11월부터 교단 형태를 갖춰 지금은 '기독교복음침례회'가 되었다. 구원파는 침례회라는 이름을 쓰지만 기독교한국침례회, 혹은 침례교회와는 별개의 단체이다. 1961년 당시 대구 칠성교회(예장통합측) 담임목사로 있던 권신찬목사가 평신도운동 선교사인 네덜란드 선교사 길기수(Case Glass)의 집회에 참여했다가 거듭난 후 물에 완전히 잠기는‘침례’를 받게 되고, 그로 인해 장로교의 세례를 부정했다는 이유로 통합측 경북노회에서 1962년 12월 21일 제명 당했다. 이슈/구원파는 어떤 교회인가?-1
권목사는 미국인 독립선교사 딕 욕(Dick York)이 대구 삼덕동에 설립한 성경학교에서 공부한 유병언을 만나 그리스도가 내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복음을 알게 되어 구원을 받게 된 사실을 공유하게 된다. 권신찬 목사와 유병언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권신찬 목사의 구원 간증 : 3대째 장로교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유년시절 어느 추운 겨울날 밥을 구걸하기 위해 찾아 온 거지에게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시던 부친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느꼈었다. 그 후 자라는 동안 부친의 영향을 받아 소명감을 가지고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29세 때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 안수를 받을 때 이상적인 목회를 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지만 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 하라”는 성경 말씀에 걸려 끝없는 양심의 갈등을 겪어야 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을 지키려면 내가 가진 것의 절반은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게 나눠줘야 하는데 너무 괴로웠던 것이다. 위선자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내 양심을 두들겼다. 자신이 행할 수 없는 것을 설교단상에서 말한다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유럽에서 온 어떤 선교사의 설교를 듣던 중 “여러분 거듭났습니까?”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 설교가 끝난 후 나는 그 선교사와 만나 “나는 목사로서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왜 ‘거듭났느냐’는 물음에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선교사는 “목사님 무슨 의심이 있습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때 나는 의심이 없다고 대답했으나 마음 한구석에 석연치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후 몇 주일이 지난 1961년 11월 18일, 토요일 아침부터 설교 준비를 위해 로마서를 읽던 나는“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1:17),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1-24)라는 말씀을 읽고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시며 나는 율법의 의로써가 아니라 율법의 의와는 상관없는 하나님의 의로써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10여 년간 내 양심을 칭칭 동여매고 있던 죄의 사슬이 풀어졌다. 이전에 내가 괴로워했던 것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 것이었음을 알았다. 나는 하나님께 마음속 깊이 감사를 느끼며, “내 죄사함을 받고서 구주를 안 뒤 나의 모든 것이 변했네 지금 내가 가는 길 천국 길이요 주의 피로 내 죄를 씻으셨네…”하는 찬송가를 해가 지도록 불렀다. 참으로 세상을 보는 안목이 달라졌고 내 설교가 달라졌다. 출처 : 자서전 |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그 무렵 또 다른 장로교회 20대 청년이었던 유병언씨는 젊은 나이에 신앙생활과 현실과의 갈등으로 고민해 오던 중 역시 같은 네델란드 선교사 길기수씨의 집회설교 중 마태복음 22장 1-14절을 듣게 되었다. 그중에 특히 22:8-12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 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이 말씀을 듣는 중에 예복은 사람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의임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깨닫고 의의 옷을 입고 거듭나는 경험을 했으며 그는 미국의 또 다른 선교사 딕 요크 씨가 운영하는 선교학교에서 평신도 전도인의 훈련을 받았다. 그 후 유병언씨와 권신찬 목사는 함께 ‘평신도복음선교회’(기독교복음침례회 전신)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전도인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날로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늘어났다. #
권신찬의 사위인 유병언은 초창기 대구지역 자신의 집 '칠성예배당'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후 서울, 인천, 안양 등지로 영역을 넓혔다. 유병언은 이후 극동방송국과 인연을 맺게 되는데, 권신찬 목사는 1965년 은혜의 아침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설교를 시작하였으며, 1971년 극동방송국을 운영했던 팀선교부와 기독교복음침례회의 전신인 평신도복음선교회와 한국어방송 공동운영계약을 맺고, 유병언이 부국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유병언은 1971년 그가 부국장으로 취임할 당시, 팀선교부 소속 미국 선교사들의 제안을 받아 서울 약수동 성동 교회에서 팀선교부 소속 미국인 선교사 3명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다. 팀선교부는 미국 남침례회 소속이며 극동방송국을 설립한 단체이다. 이전에는 유병언이 극동방송국에서 안수했다고 서술하였으나, 기독교 언론사는 노회 또는 연회가 아니며 당회도 아니다.[1] 당해 평신도 복음 선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한다면 이 역시 일반 선교단체가 목사 안수를 하는 예를 찾기 어렵다. 선교사 개개인이 목사 안수를 준다는 것은 더욱 더 상상할 수 없다.
유병언은 사업가로 변신하여 1974년 부도 직전의 부실기업인 삼우트레이딩을 채권대신 인수하게 된다. 그리고 1976년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교인들 사이에는 '유 사장'으로 통하기도 했다. 이후 1982년 세모그룹으로 상호를 바꾸었다. 사업을 하는 것과 관련하여서는 "본인이 주도하는 삼우트레이딩과 주식회사 세모 등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자 교회'라며 '기업이 곧 교회'라는 논리를 편다"라고 정동섭 목사가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기독교복음침례회는 이것은 오해고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한 속죄를 이루어 놓으신 사실을,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며, 특정 개인의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든가 기도나 예배라는 교리는 가진 적이 없고, 회사를 통해 해당 교단의 상당수 신도들이 취업하여 함께 일한 사실은 있으나 그외 많은 신도들이 각자 다양한 직종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정정 및 반론보도
교단은 꽤 큰 편이라 전국의 웬만한 도시마다 지교회를 거의 하나씩은 가지고 있으며 외국지교회도 있다. 신도로 확인되지 않으면 조회해 볼 수 있는 자료가 매우 한정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성경 공부와 관련하여서는 기독교복음침례회는 매주 토요일마다 포럼 형태로 성경 공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년 전국적인 규모로 수련회(수양회)를 하여 거의 모든 교인이 참석하는 성경탐구모임를 주최하는데 규모가 매우 크며 그 안에는 장터가 서기도 한다. 오랫동안 유기농을 고수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고 고급 품질을 선호한다. 안성의 시설 자체는 좋은 편은 아니라서 언론에 언급된 '아방궁'과는 거리가 멀다. 교파 이름에 '침례'가 있음에서 알 수 있듯이 침례교식 세례를 하는데 온 몸을 물에 집어넣는 침례 방식으로 세례를 준다.
한때 교인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교세가 위축되었다. 현재는 전국 10여 곳 이상의 교회를 운영하며 10,000여명의 신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월호 사건으로 인한 금수원 압수 수색 당시 집결했던 교인수가 천명 남짓이었으며, 또한 미국 백악관 홈페이지에 한국 정부의 교회 탄압을 막아달라고 글을 올린 후 5월 15일까지 지지서명 한사람의 숫자가 8,032명이었으나 마지막 마감때에는 10만명이 넘어서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아마 해외지부 인원이 참가한듯 하다) 이러한 점을 살펴볼 때 관련된 사람들의 숫자는 많으나 수양회에서 배포하는 노트 앞면 자료집의 수양회 등록 인원을 볼때 최고 30,000명의 인원을 기록하였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최근에 연속적으로 8,000명대를 기록한것을 볼때에 실질적 국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8,000이상 10,000명 이하로 추측할수 있다.
2. 이슈와 의혹 관련 내용[편집]
1. 오대양 사건 관련 의혹
유병언은 오대양 사건에 연루 의혹을 받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오대양 사건과 관련된 혐의가 없음에도 별건인 이미 수년 전 무혐의 처리 된 적이 있는 신도들의 헌금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상습 사기 혐의로 징역 4년을 살게 된다. 하지만 이로인해 당시 세간에는 유병언과 구원파가 오대양 사건의 배후로서 잘못 알려졌고, 이에 대해 유병언은 본인의 억울함을 밝힌 적도 있다. 당시 유병언 전 회장과 오대양 간의 혐의점을 찾지 못하자 뭐라도 체포할 혐의가 필요해진 상황에서 별건 수사인 과거 불기소 사건을 억지로 들춰내어 혐의를 씌우고 형을 살게 했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기도 한다. # 과거 세 번의 검찰 수사 결과에서 오대양 사건과 유병언, 그리고 구원파의 연관성은 확인할수 없었고, 구원파는 과거의 긴 오해가 꽤나 억울했었는지 2014년에 오대양사건과 관련이 없음을 다시 요청해서 결국 2014년 5월 21일에는 인천 지방검찰청이 공문을 통해 "당시 수사기록 검토 결과 집단자살이 구원파 측이나 유병언 회장과 관계 있다거나 5공 정권의 비호가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된 바 없다."고 재확인 해주었고 해당 내용이 다시 한번 확인 보도된 적이 있다.#
2.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세간의 주목
참사 당시에는, 청해진해운의 선원들과 선장이 구원파 신도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논란이 커졌었다. 심지어 선장과 선원들이 사람들을 버려두고 도망친 것도 구원파 신도라는 점과 연계되어 구원받은 자신들은 구원받은 선민이고 다른 이들은 구원받지 않아서 신의 진노를 받아 죽을 자들이었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겠느냐라거나, 한번 구원을 받으면 죄를 지어도 된다는 교리가 있다는 루머들이 제기되기도 했다. 내국인들일 경우 신도들만 뽑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부족한 실력의 인원도 선원으로 모집하여 악재가 겹쳤다는 추측도 있었다. KBS 뉴스9 동영상 1분 20초부터
하지만, 추후에 많은 부분들이 정정되었다. 당시 가장 먼저 퇴선했던 세월호 선장 및 승무원들은 모두 기독교복음침례회의 신도가 아닌 것으로 알려졌으며, 세월호 선원 중 기독교복음침례회 신도는 의사자로 지정된 정현선 씨 외 1명에 불과했다. 또한, 교인이 아니면 채용을 하지 않는다거나 종교 교육을 통해 교인을 만든 사실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이준석 선장 및 이준석 선장의 부인은 기독교복음침례회의 교인이 아니고 직원의 약 10% 남짓만이 신도라고 한다. #
교리와 관련해서는 구원 받은 이후에 어떠한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교리를 가르친 적도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
유병언은 1997년 자신이 이끄는 세모 그룹이 무너진 이후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고 기독교복음침례회 내에서 자문 역할을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2014년 언론 보도를 통해 세모 그룹이 무너진 지 10여 년만에 재산을 다시 확보하고 해외에까지 부동산을 보유했다고 보도되어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추후에 이 재산은 개인의 재산이 아닌 대부분 기독교복음침례회 신도들이 만든 영농조합의 재산이었던 것으로 정정보도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오보들로 인해 현재까지 유병언이 수천 억대의 자산가가 된 것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 인식되어 있다.
기독교복음침례회는 과거 유기농 개념이 흔치 않던 시절부터 유기농을 오랫동안 강조해왔는데 이 토지들도 대부분 유기농 농산물 재배를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
이와 같은 유병언과 기독교복음침례회에 대한 잘못된 언론 보도들은 당시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 참사의 구조 책임에 대한 따가운 여론의 질책을 무마하기 위해서, 기독교복음침례회를 희생양으로 삼기 위한 오보인 것으로 파악되기도 한다.링크 당시 구조 책임에 대한 여론을 돌리기 위한 청와대의 의도는 이정현 홍보수석과 KBS보도국장과의 녹취 대화에서 확인 할 수 있으며, 세월호 특별조사 위원회에서 발표한 세월호 보도와 구원파 관련 날짜별 보도 횟수 추이를 봐도 확인할 수 있다. #
3. 금수원(錦繡院)[편집]
external/news.kb...
external/ph.joon...
주소: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서동대로 5908 (상삼리 1), 마전초등학교 바로 건너편.
경기도 안성시 위치. 정식명칭 기독교복음침례회 안성교회. 통칭 '금수원'이라 불린다. 금수원이라는 이름은 구원파가 땅을 사기 전부터 사용하던 명칭으로, 한자표기는 공식적으로는 錦繡院. 본래 한 영농법인의 농장이었는데 수양회장으로 쓰기 위해 매입한 장소라고 한다. [2]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03
전체 면적은 23만 제곱미터. 구원파에서 구입하기 전에는 조경 목적의 농장이었고 이후에 교회 건물들과 농사를 위한 비닐하우스, 건조장, 양식장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또한 금수원 내에는 기독교복음침례회의 초창기 인물이자 유병언 회장의 장인인 권신찬의 묘역이 있다.[3]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449&aid=0000022131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5011613372973129
external/image.e...
5월에 검찰과 경찰을 막고 농성할 때의 모습. 구원파에서는 여러 차례 성명서와 기자 회견을 통해 입장을 밝혔고 종교탄압을 중단, 공권력의 교회 진입을 반대,불공평 수사의 즉각적 시정을 촉구, 구원파를 살인집단, 테러집단 등으로 근거없이 매도하고 기독교복음침례회와 관련 인사들의 명예를 근거없이 손상시키는 것을 조장하거나 묵인하는 보도지침을 즉각 취소해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4/05/15/2014051500121.html
external/img.seo...
5월 18일 내부를 공개했을 때의 기자회견 세팅. 구원파 측에서 5월 18일 내부를 일부 공개하였다.
서울, 수원에서 동아방송예술대학교로 가는 시외버스가 금수원 앞을 지나며, 35번, 37번, 370번, 380번이 금수원 앞에 정차한다. 그렇다고 금수원 앞에서 직접 내릴 생각은 하지 말자.거기서 내려봤자 금수원에는 들어갈 수도 없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 걸어서 가까운 휴게소나 시설로 이동하기에도 너무 먼 거리다 이로 인해 금수원 압수수색이 진행될 때 38번 국도의 일부구간이 통제되어 동아방송예술대학교 측에서 임시로 셔틀버스를 안성터미널까지 운행하였다.
4. 수사 상황[편집]
참사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대통령에게 참사의 주범처럼 유병언 회장이 표적으로 지목되었다. #
검찰이 용산구 삼각지에 위치한 구원파의 본부, 그리고 유병언 가의 기업들이라며 몇몇 회사들을 전격 압수 수색을 했다. 전격 압수 수색을 하는 과정에서 유병언의 최측근 참모라며 모두 나이가 50~70대인 여자 5명이 보도되었다. 당시 뉴스보도에 의하면 유병언 구원파 조직원들을 조직하고 도피를 지휘하는 '김엄마'라고 불리는 여성이 존재한다고 전해졌으나, 엄마라는 호칭은 결혼한 여신도들을 편하게 부르는 말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며, 김엄마는 도피 총괄을 한 적이 없는 것으로 나중에 정정보도 된 적이 있다. #
당시 무차별적인 체포, 가택 수색 등을 신도들이 많이 당했고, 이에 불안해져 금수원에 모이기도 했다고 한다. #
2014년 5월 기준으로 유병언과 그의 아들인 유대균은 특경법 위반 혐의로 각각 현상금이 5억, 1억이 걸렸다. 현상금은 세금을 떼지 않고 전액 현찰로 지급된다. 구원파는 세월호는 잊히고 유병언 회장만 뇌리에 남는 상황이 현재 벌어지고 있다며 세월호가 침몰한 원인의 규명을 위해 세월호사건 진실 규명 포럼을 개최하겠다고 5억원을 내걸었다. #
2014년 6월에는 구원파 신도가 사회 전반에 분포되어 있어 검,경찰 요직내에서도 유병언 일당을 돕고 있다라는 식의 추측성 보도가 나올 정도로 시국이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이 부분 역시 검찰이 수사에 나섰으나 그 결과 사실이라고 확인될만한 근거가 없었음이 확인되었고, 국과수를 통해 유 전 회장의 사망 시점이 확인됨에 따라서 기독교복음침례회에서 유 전 회장의 도피를 조직적으로 도왔던 사실은 없음이 밝혀졌다. #
2014년 7월, 유병언으로 추측되는 사체가 발견되었다.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지만, 국과수의 부검 결과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사인은 '자살'인지 '타살'인지 여부가 밝혀진 바 없다. # 자세한 사항은 유병언/도피기록에서 보도록 하자.
유병언이 계속해서 살아있을 거라는 추측과 루머에 답답했는지 국과수에서 2018년에 기사를 통해 다시 한번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며 기사가 보도된 적도 있다. 유병언요? 사망 확인했습니다 진실의 메스, 이야기가 되다
6월 11일 D-DAY
경찰의 진입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새볔경에 경찰 6천여 명[4] 금수원주위 배치 보도. 정문주위로 여경 50여명이 배치되었으며 이유는 연행시 남성 검,경 성추행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07:40분경 YTN보도 기준
구원파의 공식 입장 발표가 시작되었다. 성명 발표자는 당시 조계웅 대변인.
성명 내용 요약에서 구원파 입장에 따르면 세월호는 금수원과 관련이 없으며 피해자임을 호소했다. 앞서 언급했던 세월호 진실 규명 자금 중 신도들의 모금으로 2억원이 모였다고 발표했으며 5억원이 모이면 진실을 규명하는 자에게 5억원을 지급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그외에는 검찰에 대한 불신을 밝힌 상태이며 국민의 호소를 요구하였다.
5억원이 모일 경우 다음 주 중에 포럼을 개최해서 검찰을 제외하고 논의를 한다는 계획을 세운 상태라고 한다.
07:57분경 YTN보도 기준
금수원 진입 작전시 사용되는 영장은 압수수색 영장, 체포 영장이라고 한다.
YTN보도 기준으로 집회상황을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가 장착된 확성기 차량을 사용중이고 범죄자 호송차량이 목격되었으며 경찰 기동대가 거의 진입포인트에 붙어있을 정도였다.
YTN 헤드라인 보도로 경찰 특수차량이 도착하였으며 경찰, 소방헬기가 상공을 선회하였는데 혹시모를 사고를 대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8시 17분 YTN보도 기준
경찰 진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목표는 유병언일당의 신변과 '두엄마' 라고 불리우는 핵심 조력자 체포다. 당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신분증을 지참한 상태에서 기자의 진입 또한 허락하였다. 경찰 측은 총력전을 벌일 예정으로 보도서 추측되었다.
기타 미디어측의 견해, 향후 작전
물리적 충돌이 거의 없었으나 체포대상 외에 일부 신도연행이 있었다. 그 과정중 온건파 신도가 개입돼서 경찰 수사에 협조를 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디까지 협조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유혈사태는 막은 것으로 보인다.
검경은 6월 12날 날이 밝는 대로 금수원내에 수색을 계속할 예정이라고 밝혔으며 혹시모를 유병언의 금수원 잠복을 대비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세월호 진실 규명 세미나
예고한데로 6월 15일 세월호 진실 규명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부실한 내용을 걷어내느라 2명만 참가하게 됐다고 한다. 보도 내용으로는 예상외로 상당히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구원파 측은 앞으로 1주마다 집회를 개최하겠다고 한다.
5. 비판[편집]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7년이 지난 2021년 2월 2일부터 구원파 비판 글을 신고해 탄압하기 시작했다. 피해사례
-> 기독교복음침례회는 수많은 정정과 반론을 받았지만 현재까지 당시의 보도 내용들이 뿌리깊게 자리잡아 그 피해가 이어지고 있고, 이에 대해 회복을 요청할 권리가 있기에 부득이하게 대응을 하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한다. FAQ. 왜 유병언 전 회장, 기독교복음침례회에 대한 글을 게시중단 하고 있는 건가요?
6. 기타[편집]
1. 2014년 4월 16일부터 9월 15일까지 지상파, 종합편성채널, 보도전문채널, 일간지, 인터넷언론 등 310여 곳 언론사에서 85,000여건의 관련 보도가 쏟아졌다. 이 중 16,000여건의 오보들에 대해 사실과 다른 내용에 관하여 유례없는 정정 및 반론보도청구가 이뤄졌으며 이러한 내용들이 받아들여져 정정 및 반론 보도를 받게 되었다. 기자수첩 세월호 본질 외면하고 시선 돌리기식 보도 구원파에 집중
그때 당시 언중위의 조정건수가 다른 연도의 평균보다 7-8배나 높아질 정도였는데 <언론중재> 기고글에는 이에 대해 세월호 사고 보도는 전대미문의 대규모 언론조정 대상이었으며, 언론중재위원회는 물론 언론사도 사상 초유의 경험을 했다며 막대한 규모의 조정폭탄에 대한 1차 책임은 언론사들에 있었고, 언론사들이 직접 취재하지 않은 정보를 기사화해 마구잡이식으로 내보냈다라고 언급되기도 했다. 당시 취재를 하거나 반론만 들었어도 천편일률적인 오보가 수백 건씩 쏟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댓글